한국기행 481편 미리보기
한반도 평화기행2
70년 분단의 장막을 뚫고
한반도에 평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그 바람이 묻는다.
당신에게 분단은, 평화는 어떤 의미인가.
70년이 흐르는 동안
전쟁과 분단에 대한 기억도,
평화와 통일을 바라보는 시각도,
세대별, 계층별로 많이 달라진 지금.
남북의 문화적 차이를 해소하고
평화와 공존의 가치를 공유하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해졌다.
역사학자, 방송인, 탈북민 등 다양한 인물들과 함께
전쟁의 상흔을 돌아보는 인문 기행을 통해
분단과 평화, 공존의 의미를 묻는다.
금강산 가는 길, 양구 – 2월 11일 (월) 밤 9시 30분
금강산에 이르는 첫 고을이란 뜻의 양구.
DMZ 접경지역인 양구의 ‘두타연’과
‘금강산 가는 옛길’은 한국전쟁 후 사람들의 출입을
통제했고 ‘펀치볼’ 마을은 과거 세 번의 검문을
통과해야 출입할 수 있었다. 한국사 강사 최태성과
방송인 김일중이 양구를 돌아보며 분단의 의미와
평화의 가치에 대해 생각해본다.
“금강산에서 내려오는 물길과 남한의 물이
합쳐지는 곳이 두타연입니다.”
“두타연”은 금강산에서 내려오는 물길과 양구
비아리에서 내려오는 물길이 만나 생긴 폭포와
연못을 두고 하는 말이다. 한국전쟁 이후 50여 년간
사람의 출입이 금지되다 지난 2004년 일반인에게
빗장이 열렸다. 그 때문일까, 원시의 자연환경이
그대로 남아있는 두타연은 열목어, 산양 등
멸종위기 동식물들이 서식하는
1급 청정 생태계의 보고가 되었다.
두타연으로 흐르는 금강산 물길을 거꾸로 오르다 보면
만나게 되는 길, “금강산 가는 옛길”이다.
부산에서 양구를 거쳐 함경도로 가는
31번 국도 일부다.
이곳에서 금강산까지의 거리는 불과 32km.
언제쯤 우리는 이 길을 따라 금강산에 갈 수 있을까?
“예전에 어르신들은
반나절이면 금강산에 가셨다고 합니다.”
민통선 최북단에 자리한 ‘편치볼’. 해안면의 다른
이름이다. 한국전쟁 당시 이곳을 본 종군기자가
마을의 생김새가 마치 펀치볼(Punch Bowl, 음료를
담아내는 그릇) 같다고 해 붙여졌다. 예전에는
반나절이면 금강산에 소풍을 갔던 곳. 하지만
한국전쟁 후 황폐해진 마을은 정부의 이주정책과
대북 선전촌으로 재조성됐다. 대형 깃대봉과 북을
향해 문이 나 있는 이주민 주택 등 마을 곳곳에
그 당시 풍경들이 남아있다.
“뭘 심어도 안 돼. 시래기 때문에 여태 먹고 살았어.”
한국전쟁 이후 펀치볼은
황폐해진 땅과 추운 날씨로 농사가 어려웠다.
절망 속에 희망이 피어나듯
이주민들의 고된 삶을 지탱해 준 건 시래기였다.
이주민 부부 김창선, 정은윤 씨 또한 시래기 덕분에
자식들 고생시키지 않고 키웠다는데…
한반도 중동부 최전방 마을,
펀치볼에 사는 김창선, 정은윤 부부가 생각하는
평화란 무엇일까?
다시 꿈꾸는 DMZ, 고성 - 2월 12일 (화) 밤 9시 30분
대한민국 동해 최북단에 자리한 강원도 고성.
DMZ를 지척에 두고 있어 한국전쟁이 끝난 후에도
사람들의 접근과 개발이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이곳에서도 삶은 이어지고 평화의
바람은 불고 있다. 한국사 강사 최태성과
방송인 김일중이 고성 일대를 돌아보며
DMZ의 의미를 되새긴다.
“산티아고 순례자의 길처럼
휴전선 250km가 평화의 길이 될 수도 있죠.”
우리나라에서 금강산을 제일 가까이 볼 수 있는 곳,
고성 통일전망대. ‘금강산 찾아가자 1만 2천 봉♬’
발치에 보이는 금강산 봉우리 중 하나인 구선봉과
감호, 해금강의 풍경이 손에 잡힐 듯하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경계의 땅, DMZ는 평화롭다.
“철책을 지나야 바다로 나갈 수 있어.”
DMZ 접경지역에 있는 마을, 명파리.
이곳 주민들은 2월이 되면
햇 돌김과 미역을 뜯기 위해 근처 바다로 향한다.
하지만 바다로 나가기 위해서는 허가를 받고
철책을 넘어야만 갈 수 있다.
하지만 50년 넘게 이 경계의 바다를 누벼온
정순옥 어머니는 불평하지 않는다
이 바다가 있어 평생의 훈장 같은 자식들을
키워냈기 때문이다. 명파리 주민들은 욕심부리지
않는다. 묵묵히 오늘을 산다. 이것이 북한을
마주한 명파리 마을의 삶이기 때문이다.
“정전이란 게 전쟁을 잠깐 멈추는 거잖아요
이렇게 오랫동안 정전하고 있는 상태가
유례가 없는 것이죠.”
민간인 통제구역 검문소를 지나면
세계 유일의 박물관이 있다.
바로 DMZ 박물관.
DMZ는 분단의 상징이다.
남과 북의 충돌을 막기 위해 생긴
155마일의 경계가 바로 DMZ다.
본디 평화를 위해 생긴 땅.
그 땅에 새로운 꿈이 움트고 있다.
길 따라 걷다 보면, 통일기원길
– 2월 13일 (수) 밤 9시 30분
부산에서 고성까지 동해안을 따라 이어진 해파랑길.
해파랑길 마지막 구간의 또 다른 이름은
통일기원길이다.
이 길을 걷다 보면
남북의 삶과 풍경을 한꺼번에 만날 수 있다.
개그맨 윤택과 탈북 방송인 한송이가
그 사연을 찾아 떠난다.
“통일되면 고향 양강도에 있는
아버지 산소에도 가보고 싶지요.”
우리나라 최북단 항구, 대진항.
최북단이란 이름에 맞게
이곳 바다에서는 북한이 훤히 보인다.
그리고 그 바다에 기대어 사는
젊은 문어잡이 선장이 있다.
북에서 온 올해 29세의 이건진 씨다.
부지런하기로는 대진항 1등.
매일 새벽 4시, 살이 에이는 칼바람 맞으며
건진 씨는 누구보다 먼저 바다로 나간다.
그의 새해 소망은 두 가지.
허탕 치는 날 없이 매일 문어를 잡는 것,
그리고 북에서 돌아가신 아버지 산소에 가보는 것.
오늘도 그는 떠오르는 태양을 보며 소원을 빌어본다.
“이북이나 여기나 사는 게 똑같지 뭐.
동포가 다 똑같지.”
산에 둘러싸여 전쟁도 피해간 곳이 있다.
바로 왕곡마을이다.
남쪽에서는 보기 힘든 북방식 전통 한옥마을인 이곳은
북풍을 막기 위한 ‘ㅁ’ 가옥구조 외에도
굴뚝에 항아리를 얹어 집안 열기를 보존하고 있다.
400년 된 한옥에 사는 어순복 할머니의 집도
마찬가지. 북에서 온 송이 씨가 고향에 온 듯한
착각이 들 정도라고. 그뿐만 아니라 할머니의
말투와 억양까지 친근하다는데…
생각지 못한 남과 북의 공통점에
놀라는 윤택과 한송이.
두 사람에게 아흔을 바라보는
어순복 할머니는 말한다. “사는 건 다 똑같다.” 고.
그리움의 맛, 인제 속초 – 2월 14일 (목) 밤 9시 30분
북에서 피난 온 실향민들은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어떻게 달랬을까?
바로 고향 음식이다.
방송인 정가은과 북에서 온 요리전문가 허진이
실향민들의 그리운 고향의 맛,
고향 이야기를 찾아간다.
“이북 사람이 노랑태(황태)를 해보라고 했어.”
황태의 고장, 강원도 인제.
황태덕장을 둘러보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는 최귀철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인제 황태 덕장 1세대다.
20대 초반 속초에서 만난
함경도 출신 실향민과의 인연으로
함경도와 기후가 비슷한 인제에서 황태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황태를 만든 시간만 55년.
함경도에서 온 황태는 인제 용대리의 특산물이 됐다.
그렇다면 이북식 황태요리는
남쪽의 황태요리와 어떻게 다를까?
북에서 온 요리연구가 허진 씨가
북한식 황탯국, 황태찜, 황태구이를 선보인다.
“고향 사람 만난 게 제일 좋다.”
함경도 북청이 고향인 아흔둘의 김송순 할머니는
한국전쟁 때 아버지의 목선을 타고
이곳 강원도 속초시 ‘아바이 마을’로 피난 왔다.
할머니가 고된 피난 생활을 버틸 수 있었던 건
다름 아닌 어머니가 북에서 해주셨던 가자미식해.
어머니의 음식으로 자식들도 남부럽지 않게 키웠다.
할머니의 식해 만들기는 현재진행형.
지금도 손수 식해를 맛보며 어머니의 손맛을 지켜가고
있다. 그런 할머니를 위해 허진 씨가 준비한 음식은
이북식 조랭이떡 만둣국. 누에고치 모양의 조랭이떡은
고치의 실이 술술 풀리듯 만사형통하라는 의미.
이 만둣국 한 그릇이 마음의 위로가 되길 바라본다.
삶은 어디서든 피어나고, 부산기행
– 2월 15일 (금) 밤 9시 30분
한국전쟁 당시 수많은 피난민이 모여든 곳, 부산
그 과정에서 부산에는 피난민들로 인해 만들어진
역사적 장소와 문화들이 많이 남았다.
부산 출신 MC 허참과 방송인 최희가
부산 피난 마을 기행을 떠난다.
“40계단 층층대에 앉아 우는 나그네.
그래도 대답 없이 슬피 우는 이북 고향 언제 가려나♬”
피난민의 애환과 향수가 담긴 곳, 40계단.
일제강점기 때부터 부두노동자들이 거주하며
생성된 이곳은 한국전쟁 당시 피난민이 몰려들어
판자촌을 형성했다. 40계단은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피난민들이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삶의
애환을 달래던 곳. 열다섯에 혈혈단신으로 피난 온
장동균 할아버지와 함께 당시의 기억을 되살려본다.
“소 막사를 칸칸이 나눠서 살았지 ”
일제강점기 때 소 막사로 쓰였던 곳은
피난민들의 주거지가 되었다.
소 막사를 3~4평으로 쪼개 나눠 살며
정을 나누며 살았던 소막마을 사람들.
지난 5월 문화재청에서 소막마을 주택을
등록문화재로 지정,새로운 역사의 현장이 된
소막마을을 돌아본다.
“나는 통일되면 아버지 산소나
한번 가봤으면 싶은 생각이 듭니다.”
터전을 미처 구하지 못한 실향민들이
몰려든 곳은 영도의 “흰여울 마을”이다.
깎아지른 벼랑 위 공동묘지에
터를 닦고 담을 둘러 삶을 이어갔다.
흰여울 마을의 터줏대감 한상원 할아버지는
13살에 흥남부두에서 어머니와 누나와 함께
이곳으로 피난 왔다.
당시 배곯지 말라고 어머니가 끓여주시던
시래깃국을 먹으며
그 시절, 흰여울 마을을 떠올려본다.
방송일시 : 2019년 2월 11일(월) ~ 2월 15일(금)
기획 : 김 민
촬영 : 오정옥
글, 구성 : 정경숙
촬영, 연출 : 최규상
(㈜ 프로덕션 미디어 길)
[출처]ebs1